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범/선수 경력 (문단 편집) ===== 팔꿈치 부상 ===== 이종범의 일본 진출 실패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유였는지 분석해보자면, 그 정도가 크든 적든 '''부상'''이 부진의 결정적인 이유가 된 건 사실이다. 이종범은 국내 시절부터 원래 몸쪽으로 오는 코스의 볼을 당겨치는 걸 좋아했다. 부상 전에는 이를 바탕으로 일본 투수의 몸쪽 공을 어느정도 잘 대처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98년 4월 중순부터 잦아진 사구들과 더불어[[https://sports.chosun.com/news/news_o3.htm?name=/news/old/199804/19980417s032|출처]],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한 이후 몸쪽 공 대처가 예전만 못해지고 스윙도 예전만큼 빠르게 나오질 못하자,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일본투수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특히 부상 이후 스윙 매커니즘이 바뀌어버려 몸쪽 공 대처능력이 떨어진 후에는 이전까지 강점이던 당겨치기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애매한 땅볼과 펜스 앞 플라이를 양산하곤 했다. 이종범과 같은 빠른 배트 스피드로 당겨치는 스타일의 우타자에게 오른쪽 팔꿈치, 그것도 안쪽 관절 부분의 골절은 치명적인 부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종범은 본래 왼손잡이였음에도 우타자로 활동했다는 점도 해당 부상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 고려해야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부상 이후 스스로 스윙 매커니즘이 완전히 변해버렸다고 말했을 정도. [[https://youtu.be/p3ScyXGtYbc?t=337|#]] 이 부상은 공격력뿐 아니라 수비력에도 악영향을 미쳤는데,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밝히길 부상의 영향으로 인해 70m-80m를 할 수 있던 롱토스의 거리가 40m-50m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덧붙이자면 이종범에게 팔꿈치 골절을 입힌 가와지리의 볼이 강속구 고의 빈볼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았는데, 가와지리는 언더핸드 투수에 패스트볼의 최고구속이 120km 후반대인 투수로 '''당시 이종범에게 던졌던 볼은 변화구였고 헛스윙 판정에 스트라이크였다.''' 무엇보다 우타자의 왼쪽 팔꿈치면 모를까, 오른쪽 팔꿈치 안쪽을 노려서 빈볼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공이 유도미사일이 아닌 한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얘기. 부정적인 분위기로 선동하는 찌라시들과 부화뇌동하는 팬들 덕택에 우리나라에서 가와지리에 대한 평가가 매우 안 좋아졌는데 가와지리는 그 후에 [[한신 타이거스]]의 단장[* 인터넷 상에는 아버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스톡킹에서 본인이 밝힌 바로는 당시 한신의 단장이었다고 한다.]과 함께 병원까지 찾아가 이종범에게 사죄까지 했다. [[https://youtu.be/p3ScyXGtYbc?t=413|관련 영상]] 이종범이 오히려 안절부절 못할 정도의 진실한 사과였고, [[박동희(기자)|박동희]]의 칼럼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이종범은 처음으로 '타인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되었다'고 한다. [[http://m.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295&aid=0000001509|링크]] 이종범 자신도 전혀 빈볼이라거나 일부러 맞힌 공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었지만 딱 잘라 말하면 자신이 치려고 나가다가 맞은 공이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앞서 주석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의 수석코치였던 시마노 코치의 인터뷰에서 그 날 시마노 코치는 유독 주니치에게 강했던 가와지리를 압박하기 위해 주전 모두 앞으로 나서서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타격하라는 작전을 냈다고 한다. [* 몸쪽 공이 특기인 선수였다. 일미 올스타전 완봉의 비결도 몸쪽공이 주효해서 였다.] 이종범은 이를 충실히 실행하다가 부상을 당한 것. [[https://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97-20211117-12&fbclid=IwAR2J8yiw-cmtHfqz7Cv4RyFhG4m-bJVbqZX7vB1IUGan5EEpmYRa1KUCktE|링크]] 하지만 어이없게도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서는 이 변화구를 150km짜리 강속구로 포장했고 방송분에서는 이종범도 이에 동조하며 자신의 부진이 주변의 차별과 압박 탓인 양 돌리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이 때의 반응으로 [[김성근]]이나 [[선동열]]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이종범이 일본에서 배운 것도 없고 반감만 키워왔다고 하기도 하지만, 정작 이종범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의 2군 시절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고, WBC 결승타 후 일본 진출 실패에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점도 있다고 인터뷰 했다. 은퇴 후 강연에서도 본인이 당시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했었다는 말도 했었다. [[https://youtu.be/-xaL68O2LcI|관련 영상]] 정말로 본인의 실패의 모든 것을 당시 주변의 탓으로 돌렸다면, 주니치에 자비로 직접 코치연수를 신청하고 2군에서 배워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 야구 진출 후 불만을 드러낸 부분은 비단 이종범만의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선동렬도 첫해에 부진할 때는 스트라이크존에서 불만을 토로했고 국내로 복귀한 정민태, 정민철도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차별여부는 알 수 없으나, 당하는 사람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게 사실이다. [* 이종범은 첫 해에 부상 전까지 리그 1위에 해당될 정도로 잦은 사구도 있었으며, 판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영상이 있을 정도였다. [[https://youtu.be/ZUlSoISWGPo|관련 영상]]] 다만 국내 구단들의 용병에 대한 시선이나 대우를 생각해보면 사실 다른 리그로의 이적에는 용병으로써 어느정도 적응에 대한 의무감이 생기는건 어쩔 수가 없다. 해외 진출한 국내 선수들 중 성공한 케이스와 실패한 케이스로 나뉘는 척도도 보통 한국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리그의 사정이나 본인의 기량에 대해 얼마만큼 사색하고 노력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와는 별개로 아무래도 본인이 고생했던 만큼, 일본 야구에 대한 반감은 다소 남아있는 듯하다. 이 때의 부상과 관련해서 본인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당시 도루 20개에 2천만엔, 초과시 1개당 100만엔에 달하는 거액의 인센티브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가난했던 구단인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는 만져보지 못할 거액의 인센티브였고, 무엇보다 본인이 스스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용병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갔다고 했던 만큼, 이로 관련한 6월 초의 슬럼프에 대한 부담이 '몸에 맞아서라도 나가자'라는 방식의 무리한 타격을 이끌어내는 결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https://youtu.be/B1rQ95SNsUU|#]][[https://youtu.be/p3ScyXGtYbc?t=20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